안정숙, ‘실 드로잉’과 몸의 기억
서성록 | 미술평론가, 안동대 명예교수
안정숙의 근작은 자연을 벗 삼은 작업에 초점이 모아진다. 그가 가본 곳, 밟아본 곳, 바라본 곳, 향기와 감촉을 느껴본 것에 대한 소감만 아니라 계절감각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작업을 한다. 자연이 주는 혜택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사계절의 변화와 동식물 등 아무리 하찮은 것일지라도 자연의 존재는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 화가와 시인을 포함하여 역대의 예술가들이 그토록 침이 마르게 자연을 노래한 이유를 말해 무엇 하랴.
이전에 안정숙는 꽃과 계절의 충일함을 주제로 작업한 적이 있지만 요사이에는 부쩍 계절의 변화에 집중하는 모습이다. 겨울의 정적, 봄의 파릇함, 여름의 무성함, 가을의 추억 등이 화면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장식하고 있다. 잠시 동작을 멈추고 화면에 주의를 모은다면 우리는 명증한 색과 선의 리듬으로 직조된 계절의 찬가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그동안 꾸준히 자연의 이미지를 추상적으로 번안하는 작품을 해왔다. 갑자기 세상을 떠난 지인들을 추모하는 작품전을 꾸민 일도 있지만 그 경우에도 작가는 물결이라는 자연의 이미지를 차용하는 형식을 택했다. 평론가 신항섭이 기술하였듯이 ‘자연 및 생명의 원초성에 대한 조형적 사유’가 작품의 기저에 흐른다. 근작만 하더라도 작가는 ‘한계령’, ‘새노야’, ‘원대리’, ‘산유화’, ‘하늘과 바다’, ‘해질 녘’, ‘은행잎’, ‘산바람’ , ‘파도’ 등과 같이 자연적인 이미지에 착안하고 있다.
하지만 그의 작업이 자연의 모방이나 재현을 목적으로 삼고 있지는 않은 것같다. 자연적 모티브를 빌려오고 있으나 이미지 자체가 분명하지 않을뿐더러 전체적으로 암시적 또는 추상적 이미지에 기울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자연적 모티브를 빌려 무언가 다른 것을 표상하려고 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마르셀 프루스트(Marcel Proust)의 마들랜처럼 몸속의 기억을 소환하는 실마리가 되는 듯하다. 만일 그가 자연 재현을 의도하였다면 마땅히 구체화된 형태가 있어야 할 것이나 안정숙의 화면에서 그런 형체를 찾기란 힘들다. 오히려 그의 작업은 추상 작품으로 분류하는 것이 옳을 듯한데 자연에서 받은 주관적 정서를 여러 색채언어로 풀어놓았다는 느낌을 받는다. 클로드 모네가 지베르니 정원을 아름답고 신선한 색채언어로 표현했듯이 안정숙 역시 그가 자연에서 받은 인상을 풍부한 색채로 재구성하였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다.
여기서 지나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형성과정이다. 그의 하루일과는 잠깐 외출할 때를 제외하고 거의 작업실에서 지내는 편이다. 하루 중 열 시간 가량을 작업에 쏟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작업에 진심이라는 방증인 동시에 그만큼 작품 제작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뜻이기도 하다. 효율성과는 거리가 먼 작업을 하기 때문인데 캔버스에 살짝 물감을 입힌 것이 아니라 여러 재료를 혼합하여 쌓고 또 쌓아 부조로 느껴질 만큼 두툼하고 촉각적인 표면을 자랑한다. 물론 이 장면을 보며 역경과 시련, 낭패와 좌절의 허들을 뛰어넘어야 하는 결코 만만치 않은 ‘인생의 경주’를 연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지난한 바탕작업이 마무리되면 이제부터 작가는 색실을 가지고 화면을 가로 지으며 부지런히 오간다. 본격적인 ‘실 드로잉’ 작업에 착수하는 셈인데 바닥에 지지체를 놓고 위를 좌에서 우로, 우에서 좌로,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위로 오가며 색실을 얹히는 것이다. 일종의 ‘실 드로잉’인 셈이다. 색실이 붓질의 기능을 대신하기 때문에 한 올 한 올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얹혀간다. 이 순간이야말로 작가가 희열을 느끼는 순간이다. 일단 작업을 시작하면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 일을 계속한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화면은 색실로 구성된 공간으로 재탄생된다. 혼란스러운 것같지만 자세히 보면 패턴을 유지하며 자유스러운 모양을 갖추고 있다.
이쯤이면 그의 작품은 어떤 것을 표현하였다기보다는 몸짓이 주체가 되는 ‘행위의 무대’로 간주될만하다. 색실에 신체적인 리듬이 가미되면서 한층 행위의 요소가 두드러진다. <초혼>의 경우 색실이 작품의 주된 구성요인이 되었지만 표면색 아래 깔려 있었던 데 비해 <32일의 여행>에서는 색실이 표면색과 함께 주된 요인으로 등장한다. 색실이 물감에 의해 가려지지 않고 그대로 노출됨으로써 신체성이 작품의 주도 동기임을 알리는 셈이다.
작가는 왜 행위를 강조하는 걸까. 물질성을 강조하는 것도 그렇고 행위를 강조하는 것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공통적으로 몸의 의미와 관련된다. 예술작품의 의미는 그것의 물질적 형식과 구별될 수 없다. 그러므로 예술 작품의 물질적 의미는 그것의 물질적 형식과 결합되어 있으며, 우리 자신의 물질성을 되울리고 우리의 몸에 의해 이해된다. 행위의 주도성이 두드러진 것은 몸 자체가 언제나 나의 세상을 구성하고 있으며 몸이 세상 안에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재현하지 않아도 신체성만으로도 충분하며 (왜냐하면 우리 몸 자체가 의미의 집합체이므로) 따라서 작가가 캔버스 주위를 배회함으로써 자연의 체험을 인지적 무의식으로 재구성하게 된다. 이런 흐름에서 볼 때 이미지가 있고 없고는 그의 작품에서 큰 의미를 차지하지 않는다. 행위 자체가 이미 자연의 동인(動因)을 지니고 있고 의미의 물리적 토대로 생명적인 것을 표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작가는 활력적인 표현과 절제된 차분함 사이를 오가며 조형적 질서를 갖추려고 힘쓴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과거의 작업과 근래 작업은 약간 차이가 있다. 종전처럼 조형적 질서보다는 회화세계가 지닌 신체성, 그 신체성은 인지적 판단에 의한 반응이나 그에 더해지는 무언가가 아니라 정서로 체득된 그 무엇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는 쪽으로 나가고 있다. ‘실 드로잉’을 마무리 짓고 바닥에 놓은 화면을 밟는 행위 또한 이러한 개념의 연장선 위에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보고 느끼고 접촉하며 감응하는 신체적 지각의 우선성에 바탕하여 작가는 세상과 관계를 맺고 세상을 바라본다.
예술작품은 작가에 의해 태어났지만 그 자체로 또다른 세상의 모형이기도 하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향유하며 그 안에서 살아간다. 그것은 우리가 사유에 잠겨서 삶과 동행하고 쉬어가는 무엇이다. 이것은 미술가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다른 방식으로는 배울 수 없는 무언가를 배우는 공간, 즉 생각을 넘어선 경험이며 감각을 통해 얻는 독특한 이해이다. 은행잎을 바라볼 때 그것은 색과 모양으로만 체험되기보다는 가촉성과 향, 바람, 엉클어짐과 함께 다가온다. 거기에 가을이 지닌 사연과 고즈넉함도 곁들어진다. 안정숙의 회화는 온 몸으로 세상을 지각하고 바라보는데 요긴한 장치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