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성석
우리는 지금, 누구의 달빛 아래에 서 있는가
이명진은 반복되는 패턴 속에 개인의 모습을 위장하는 회화를 그려왔다. 비슷해 보이는 삶들이 화면을 가득 메우고 있지만, 그 아래에는 각기 다른 존재들이 숨어 있다. 마치 숨은 그림 찾기처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비로소 드러나는 인물들처럼 말이다. 작가는 이 같은 상황 속에 직접적으로 개입하기보다는, 관찰자이자 전달자의 자리에서 응시하는 태도를 고수해 왔다. 사회적 구조 속에 겹겹이 감춰지고 덧입혀진 흔적과 감정의 표정을 하나씩 끌어올리며, 이미지 이면에 내재한 개인의 서사를 천천히 드러내는 것이다.
이번 전시 ≪Moonlight≫는 이전보다 한층 더 다정하면서도 조용한 시선으로 타인의 삶을 비춘다. 관찰자의 입장을 벗어나, 베틀 앞에 선 구성자의 태도로 서로 다른 시간과 인물을 한 화면 안에 교차시켜 짜 넣는다. 기억의 실, 감정의 선, 익명의 이야기를 엮어가며, 하나의 장면 안에 중첩된 시간과 감정을 촘촘히 직조한다. ‘Moonlight’라는 전시 제목은 이러한 태도 변화와도 맞닿아 있다. 조선 세종이 지은 찬불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에서 영감을 받아, ‘하나의 달이 천 개의 강물에 비친다’는 구절처럼, 누구에게나 드리워지는 달빛을 상상의 매개로 삼는다. 작가는 이 달빛을 빌려, 타인과 나 사이에 조용히 스며드는 감정의 결을 포착한다.
전시는 크게 두 방향의 작업으로 구성된다. 익명의 이야기 속 감정을 회화로 번역한 작업과, 실제 장소에서 촬영된 기념사진을 중첩해 구성한 작업이다. 서로 다른 출처에서 출발하지만, 두 작업 모두 흩어진 기억의 조각들을 화면에 엮어내며 하나의 서사를 만들어 낸다. 첫 번째 축은 SNS 플랫폼 ‘스레드(Threads)’에 남겨진 누군가의 고백에서 출발한 회화 연작이다. 작가는 스레드에서 수집한 익명의 기억 조각을 회화의 재료로 삼아, 흐릿한 형상과 타인의 이야기가 얽혀 있는 감정의 잔상을 부유하게 만든다. 우리가 하나의 달을 매개로 말하지 못한 소원을 조용히 빌고, 차마 꺼내지 못하는 이야기를 불특정 다수가 머무는 공간에 남기듯, 디지털 플랫폼은 이들의 기억과 고백들이 조용히 포개지는 장소가 된다. 어쩌면 이름 모를 누군가도 같은 달을 올려다보았을지 모른다는 상상처럼 말이다.
또 다른 축은 특정 장소에서 촬영된 사람들의 기념사진을 바탕으로 한 회화 작업이다. 정방폭포를 배경으로 한 < Moonlight-Waterfalls > (2025) 연작은, 각기 다른 사진 속 인물을 하나씩 따로 옮겨와, 같은 장소에 포개지는 저마다의 시간을 드러낸다. 연작의 마지막 작업에서는 여러 사진을 중첩해, 반복된 순간들이 쌓이며 만들어낸 기억의 결을 보여준다. 흘러간 시간들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하며 만들어지는 장면은, 풍화되어 지워진 듯한 자국을 남기고, 시간과 감정의 층위를 머금는다. 희미하게 번지는 달빛처럼, 그 이미지들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화면 속에 스며든다.
이명진의 회화는 한눈에 파악되지 않는다. 반복되는 구조와 위장된 질감 속에 조심스럽게 숨어 있는 인물과 이야기를 만나기 위해서는 시간을 들여야 한다. 관람자는 이미지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야 한다. 그리고 단지 그림 속으로 ‘들어가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안에서 ‘엮이고 있는 것’을 본다. 낯선 타인의 얼굴과 어쩌면 나 자신의 기억은 화면 위에서 겹치고 어긋나며, 삶의 순간들이 각기 다른 색실로 짜여 나간다. 누구나 한 번쯤 그 앞에서 사진을 남겼을 법한 유명한 장소처럼, 우리는 비슷한 포즈로 삶의 한순간을 기록해왔지만, 그 모든 장면은 각자에게 단 하나뿐인 기억으로 남는다.
≪Moonlight≫는 바로 그 ‘비슷하지만 같지 않은’ 시간들을 달빛 아래에서 다시 떠오르게 한다. 소셜미디어 속의 단편적인 감정과 익명의 서사가 작가의 회화적 언어로 재구성되고, 타인과 나 사이의 거리, 공적인 공간과 사적인 기억의 경계가 서서히 흐려진다. 작가는 삶을 기록하는 행위 속에서 빛나는 개인의 순간들을 하나하나 길어 올리며, 관람자에게 조용히 묻는다.
우리는 지금, 누구의 달빛 아래에 서 있는가.
장민현 |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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